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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옛터가 금지곡이 된 사연

이원석(문엄) 2011. 7. 7. 14:59

 

                   ▲ 황성옛터 작사가 왕평의 무덤이 있는 송강리 산골의 수정사 대웅전 처마의 풍경

 

                   ▲ 수정사 앞산 능선에 왕평의 묘(墓)가 있다.

 

                   ▲ 왕평이 유년시절에 살았던 수정사 아랫마을 송강리 옛집

 

                                ▲ 우리나라 최초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된 전수린 곡, 왕평 작, 이 애리수의 노래 '황성옛터' 음반

 

                    ▲ 경북 청송군 31번 국도 변 송강리 솔숲에 세운 '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

 

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는 두 개로 그가 태어난 영천 조양공원의 '황성옛터' 노래비와 그가 유년시절을 보내고 그의 묘(墓)가 있는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31번 국도변 송강 솔밭에 '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가 지난 10월에 세워졌다.


그리고 왕평의 출생지 영천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황성옛터'란 노랫말로 민족혼을 일깨운 왕평(이응호)을 기리는 '왕평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가요 '황성옛터' 노랫말을 지은 왕평 이응호는 1908년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5~7세)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에서 잠시 살았고 그의 묘소도 송강리 3번지 수정사 앞산에 있다.그가 유년시절에 살았던 옛집이 지금도 수정사 아랫마을 길가에 있다.

왕평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 1기생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 극작가, 가요 작사가로 일제 강점기의 설움을 극단 연극사(硏劇舍)에서 예술로 달래던 1930년 어느 늦여름 밤. 중국과 만주 공연을 순회한 극단 연극사(硏劇舍)의 일행은 황해도 개성에서 공연하고 있었다.


때늦은 장마로 며칠을 공치면서 고향이 개성인 작곡가이자 연극사의 바이올린 연주자 ‘전수린’은 ‘왕평’과 만월대에서 폐허의 황성옛터를 바라보며 망국의 슬픔을 함께 느꼈다.


늦장마비가 여인숙의 창틀을 때리는 소리에 몸을 뒤척이던 전수린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바이올린의 활을 잡아 비분(悲憤)하고 서러운 곡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곡조는 오선지에 옮겨졌고, ‘왕평’이 노랫말을 적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일우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 없이 눈물져요.》

이렇게 개성 여인숙에서 탄생된 '황성옛터'는 그 해 가을 단성사에서 ‘이 애리수’의 노래로 무대에 올려지게 된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 오는 ‘이애리수’의 애잔한 노래에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후 '황성옛터'는 '황성(荒城)의 적(跡)'이란 곡목으로 Victor에서 음반이 출시되어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조선인으로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백성의 민족정서를 자극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응호(왕평)와 개성 출신 작곡가 전수린은 일제 헌병대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당하며, '황성옛터'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이 되었다. 그 무렵 일제에 의한 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압제는 더욱 가중, 많은 이들이 고향산천을 등지고 만주와 시베리아로 떠나며 이 노래를 불렀다.

왕평은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민족성 강한 노랫말을 담은 '대한팔경', '조선행진곡' 같은 작사를 하였으나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1934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공연을 하던 중 무대위에서 쓰러져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다행히 그의 민족혼과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황성옛터'의 노래비가 경북 영천 조양공원과 그의 유년시절을 보내고 그의 묘소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31번 국도변 수정사 들머리길 솔밭에 세워졌다. 그의 묘도 수정사 앞산에 있다.

 

<출처 : 정해유의 즐거운 디카여행> http://community.yeongnam.com/yeongnam/html/community/kiss/dica/02/Read.shtml?num=9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