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가운데 염불골 계곡의 물소리가 만들어내는 청아한 소리와 한가롭게 산새들이 일대를 날아다니면서 평온함을 선사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에서 임야 가운데 있는 고적 유물을 조사해 고적대장을 만들고 그것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를 기초로 지난 2006년 3월 19일 첫 답사를 나선 이래로 거의 3년만이다.
이 책의 영천군조의 불상항에 「팔공산 아래 진불암 계곡의 암석지내(巖石地內)의 일부에 수도사에서부터 약 20정(약 2.2km), 진불암에서 수정(數町:1정은 약109m)의 산중턱에 거대한 화강암 굴속에 자연석에 조각한 높이 3척, 흉폭 1척8촌의 좌불상 1구, 높이 3척4촌 흉폭 1척2촌과 높이 2척5촌, 흉폭 1척2촌의 수호불 각 1개가 있는데 표면에 균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다른 두 구는 일부 파손된 곳이 있어도 거의 완전에 가까우며 근처에 분쇄되어버린 2, 3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6일 오전 대구 팔공산지킴이 조명래(53ㆍ경주 불국사 문화재위원/문화유산해설사)ㆍ박용근(55)ㆍ서태숙(49) 회원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중 답사에 나섰다.
공산폭포를 지난 후 현수교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직진하면 진불암 1.3㎞, 동봉 3.2㎞, 수도사 1.7㎞ 지점에 6ㆍ25동란 이후 산판을 했던 제재소 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개울을 건너지 않고 등산로를 죽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위로 올라가면 거대한 화강암 석굴이 우뚝서있다.
석굴은 입구 폭 230cm, 높이 140cm, 굴 안 가로 폭 470cm, 최고높이 190cm, 길이 490cm의 아치형으로 성인 7-8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입구 우측의 바위에 넘어진 나무뿌리로 인한 파손이 있어 보수가 필요하고, 굴 안의 바위도 손으로 당기면 떨어지나 대체로 양호한 상태이다.
수도사에서 동남쪽으로 약20정(2.2㎞)이지만 직선거리는 650m 정도이며 GPS로 측정해보니 해발은 620m정도였다.
석굴은 찾았지만 삼존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일본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고, 6ㆍ25사변 후 산판(벌목 또는 벌목을 하는 곳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을 하면서 누군가가 가져갔을 경우 등으로 추측되지만 삼존석불의 존재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고려 말 승려 신돈이 실각하면서 일대의 불상을 부처굴에 모두 숨겼다고 합니다. 좋은 불상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산판 당시 인부들이 ‘저안에 부처 들었다’며 굴을 향해 손가락질하면 반드시 다쳤어요.”
내려오는 길에 산 아래 마을인 치산리에서 자랐다는 대한불교 태고종 영지사 주지 이상열(72)씨를 방문하니 어릴 때 기억을 이야기했다.
이씨는 이어서 일설에는 우리나라에 3개의 석굴암이 있는데 경주석굴암이 제3석굴암이고 군위삼존석굴이 제2석굴암이며, 치산계곡에 있는 석굴암 즉, 부처굴이 제1석굴암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고도 했다.
한편 팔공산지킴이는 옛 자료와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주변의 흔적을 찾아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팔공산으로 향하고 있다.
제1석굴, 시루봉의 우물, 돌아부지, 공산성, 오도굴, 장군바위, 옛수도사터, 절도바위, 광석대 등을 직접 확인했으며, 절터로 추정되는 곳은 아직도 계속 조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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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구봉 |
앞으로 더 찾아야할 것도 있어 올해 4월 초파일을 기점으로 치산벨트를 활용한 추천 산행코스와 자료조사 내용을 발표할 예정으로 치산벨트의 조사가 끝나면 ‘은해사벨트’ 역사를 찾아 나설 계획이다.
은해사벨트 탐사는 영천문화원, 영천향토사연구회와 함께 진행하기로 약속하고 이날 부처굴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준 팔공산지킴이 회원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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