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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재발견(5)-경주 최부자집

이원석(문엄) 2010. 1. 30. 21:42

경주 최 부자 300년 富의 비밀, 돈 아닌 사람에 있었네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5.경주 최부자집(慶州校洞崔氏古宅)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최부자 가문의 고택. 김우수 기자 woosoo@kyongbuk.co.kr

 

인간에 대한 성찰을 연구하는 인문학이 실종되고 테크놀로지(技術)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부(富)'는 곧 '돈'과 '권력'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무한경쟁사회인 자본주의사회에는 '돈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부의 축적(蓄積)'이 성공의 척도(尺度)로 자리잡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부(富)'에 대한 개념을 왜곡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추구해 왔던 '부의 개념'에는 돈과 권력의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배려하는 따듯한 정서가 함축돼 있다.

진정한 '부(富)'는 '물질적인 축적'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담긴 '정신적인 충만'이 함께 했을 때 빛을 발한다.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 육훈

 

최근 방송 드라마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명가(名家)'의 모델인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을 찾아 부자(富者)가 가져야 할 덕목과 교훈을 알아본다.

예년에 없던 겨울 추위가 경주에도 찾아 왔지만 최부자집에는 따듯한 겨울햇살과 함께 방문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경주에서 오랫동안 한학과 향토사를 연구하며 경주고교에서 25년째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조철제(59·한문 담당) 교사는 햇살을 몸에 받으며 최부자집에 대한 내력을 얘기했다.

"예로부터 경주 교촌 최씨 가문은 영남 뿐만 아니라 전국의 거부(巨富)이며 명문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9대 진사(進士) 12대 만석(萬石)으로 유명한 최씨 가문은 흔히 최부자집으로 불리었습니다. 이들 최씨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견실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위선(爲先)에 관한 일과 인재 양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최씨 가문이 임란 이후 근대까지 부(富)를 유지하고 많은 인물을 배출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 세간에 화제가 되어 왔습니다. 부불삼대(富不三代), 곧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란 말이 있습니다만 경주 최부자집은 12대 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지침 육연

 

부자(富者) 3대(代)를 못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대에 축적한 부를 후대까지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집의 만석꾼 전통은 이말을 초월한 듯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이어갔고 마지막으로 1950년에는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부자. 그 집안의 부자 노하우를 들어본다.

"최부자집이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문에서 인물이 대대손손 배출됨으로써 인재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인재들이 선대들의 유훈을 받들어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권력보다 부에 비중을 둔 가계를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조철제 경주고등학교 교사

 

부를 축적한 이후 권력에 진출했다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세도가들이 많았던 것을 짐작하면 최씨 가문은 이러한 세상 삶의 지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권력을 향해 치닫기보다는 부에 비중을 둔 최씨 가문이 부자로서 대를 이으며 부의 전통을 수립할 수 있던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인 '육훈(六訓)'과 자신을 지키는 지침인 '육연(六然)'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육연과 육훈에는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 하나도 없어 부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부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던 '육훈'과 '육연'에는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웃과 상생을 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육훈은 첫째로 '절대 진사(제일 낮은 벼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권력 투쟁에 휘말려 집안이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둘째로 '재산은 1년에 1만석(5천 가마니)이상을 모으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뜻입니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해 흔히 말하는 부자의 도덕적 사회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지요.

셋째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집안에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데는 신분의 귀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로 붐볐고 그로 인해 세상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었던 것도 많은 힘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넷째는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는 인간적인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시대 부자들은 대부분 이웃에 대한 착취로 비난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최씨 가문은 부를 축적하는데 있어서 이웃의 아픔과 함께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유지를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다섯째는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 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고 했습니다. 명문가에 시집을 오는 며느리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을 해 타인의 고통을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가훈을 지켜 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여섯째로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고도 했습니다. '부의 원천'이 이웃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부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를 충실히 할 때 가능하다'는 가훈을 실천한 최씨 가문이 이러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지키는 데에도 엄격 했다는 데에서 단순히 부자가문이 아닌 철학적 기반이 있는 높은 품격을 갖춘 진정한 부자 가문임을 말해준다.

"경주 최부자집 후손들의 술회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매일 아침 조부님 방에 문안을 가면, 붓글씨로 조부님이 보는데서 자신을 지키는 지침인 이 육연을 써야만 했다고 합니다.

육연에는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만의 적선이 아닌 나눔으로 부자의 사회책무 실천한 집안"

조철제 경주고등학교 교사

"경주 최부잣집 가문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부(富)의 축적과정'과 '재산의 사회환원'을 통해 한국식 부자의 사회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집안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나눠 주겠다'라는 오만하고 과시하는 요식행위가 아닌, 같이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지혜'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주에서 한학과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조철제(59·사진) 경주고 교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단순히 상류층이 '적선(積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하나의 의무조항이 아니라 좋은 삶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주 최부잣집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조철제 교사는 "경주 최부자집 가문은 오랫동안 부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만 부각돼 있지만 사실은 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등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애국자적인 집안이었습니다. 최부자집이 경주향교에 계림대와 대구 청구대 설립에 가산 전부를 투자한 것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최근 돈이든 권력이든 모든 것이 노력의 결과이고 사회적 책임은 없다는 '개인화'를 경계 하고 빈자(貧者)와 부자(富者)가 서로를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즉, 주는 계층은 베풂에 있어 자발적 동기를 가져야 하고 수혜자들도 받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기보다 자신도 언젠가 사회에서 나눌 수 있다는 의식을 가져 사회적 호혜정신을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로 전해져 온다.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재물(財物)은 분뇨(糞尿·똥거름)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惡臭)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四方)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경북일보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