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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재발견(4)-경주 황룡사

이원석(문엄) 2010. 1. 30. 21:40

황룡사 '동아시아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 원대한 꿈 서려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4. 경주 황룡사(皇龍寺)
 
경주 황룡사지 전경

 

천년의 세월이 흐른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는 누렇게 변색 된 잔디 위에 겨울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천년의 숨결을 느끼려는 답사의 발길로 황룡사지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넓은 대평원을 연상케하는 경주시 구황동의 황룡사지는 한눈에 봐도 신라 천년고도 서라벌의 중심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황룡사지 남쪽엔 궁궐인 월성과 불국토 남산, 서쪽엔 선도산, 동쪽엔 명활성, 북쪽에 소금강산이 위치해 사방에서 중심으로 향하는 기(氣)가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전해져 온다.

 

황룡사 금당 장육존상 터

 

'신라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임을 만방에 알린 거대한 가람이었던 황룡사가 그 옛날 위용을 되찾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학문적 깊이로 수준 높은 문화재 해설을 하고 있는 김호상(45)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겨울 햇살이 내려앉은 광활한 황룡사지에서 웅장하고 화려했던 황룡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룡사지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된 신라의 대표적인 사원으로 사찰명이 확인된 몇 안되는 사찰 중의 하나이며 신라 최대 크기의 평지에 세워진 사찰이었습니다. 황룡사는 월성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사찰의 규모나 격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14년(553년)에 이곳에 궁궐을 짓던 중 용이 나타났기 때문에 궁궐 대신 사찰을 지어 황룡사라 이름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궁궐을 확장하려는 왕실에 대해 귀족들의 반대 의견이 많아 사찰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황룡사 9층탑 모형

 

황룡사가 신라 대표 사찰이었던 것은 황룡사에 신라 3보(三寶)인 '9층 목탑'과 '장육존상', '진흥왕 선사옥대'가 있었던 것이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중 9층탑은 높이가 80여m에 이르고 각 층마다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의 복속을 기원할 만큼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못가를 지나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용은 나의 장자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에 돌아가 9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자장이 귀국해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자 선덕여왕은 백제의 대장(大匠)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고 김용춘에게 신라장인 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게 해 탑을 만들게 했습니다.

 

김호상 신라문화유산硏 연구실장

 

9층탑의 정면과 측면은 모두 일곱칸으로 한 변의 길이가 22.2m인 사각평면으로 바닥의 면적은 500㎡에 이르렀습니다. 높이는 183척(약 65m), 상륜부가 42척(약 15m), 합해서 225척(80m)의 웅장한 규모였습니다.

신라는 이 탑을 세우면서 각 층마다 한 나라씩 조복(調伏) 되기를 기원했으며 1층부터 일본, 중국,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鷹游), 말갈,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 등 이었는데 그 순서로 보아 신라의 적국(敵國)의 세력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탑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시작돼 2년후인 645년에 완성됐으며 9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 됐습니다. 탑은 완성된 지 50년 뒤인 효소왕 7년(698년)에 벼락을 맞고 불에 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듭했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년) 탑을 재건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 내의 찰주본기(刹柱本紀)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593년간 이어 내려오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에는 중수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목탑 터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목탑의 모형은 인근 남산자락 탑곡마애조상군에 새겨진 탑의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황룡사의 9층탑이 대외적으로 '신라의 위상'을 표방하는 대표적 상징물 이었다면 금당의 장육존불(丈六尊佛)은 내적으로 그 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인 '절대적 존재' 였다. 따라서 장육존불은 신라인들에게 꿈을 이뤄주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황룡사터의 금당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금당의 중앙에 남아있는 금동삼존장육상 3개의 대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십대제자상과 신장상 2구를 배치할 수 있는 대석이 남아 있습니다. 대석은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 윗면을 일단 편평하게 고른 뒤 장육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촉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습니다.

장육불상이란 석가(釋迦)의 키가 1장6척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불상은 574년(진흥왕 35년)에 주조된 것으로 인도의 아쇼카왕이 철(鐵)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으로 이뤄질 것으로 발원했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 실어 보냈습니다. 이 배가 울산만에 도착하자, 금과 철을 동축사(東竺寺)에 모셔두고 있다가 경주로 실어와 장육상을 주조했는데 무게가 3만5천700근에 황금 1만136푼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2천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불상은 금동으로 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년)에 세웠습니다."

황룡사에는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보다 4배가 넘는 대종(大鐘)이 있어 가람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크고 뛰어난 대종의 종소리는 어떠했을까? 아마도 신라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희망의 종소리' 이었을 것이다.

"황룡사의 종은 무게가 49만7천581근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4배가 넘는 셈입니다. 또한 이 종보다 17년 앞선 754년에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몽고군이 탐을 내어 종을 동해까지 옮겨 배에 실었으나 무거워서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감은사 앞을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은 이때 종을 옮긴 하천이어서 이름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나 조선시대까지 명칭은 각종 지리지에 동해천(東海川)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백제·고구려 예술 어우러진 황룡사는 삼국문화 결정체"

김호상 신라문화유산硏 연구실장

"신라의 대표적 브랜드인 황룡사는 신라와 고구려, 백제 삼국의 문화 결정체가 어우러진 한국문화의 전형입니다. 9층탑은 백제 최고의 예술가인 아비지가 조성했고 가람구조는 '3금당 1탑'의 고구려 양식으로 신라인이 건축을 했기 때문입니다."

김호상(45·사진)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황룡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한하다고 강조했다.

"황룡사 목조 9층탑은 높이가 80여m에 이르는 대표적인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이고, 높이 4m80㎝ 웅장한 자태의 금빛으로 빛난 장육존상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을 만큼 신비한 존재였습니다. 황룡사는 종교적인 차원을 초월해 예술적 가치로도 단연 으뜸입니다. 특히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 소나무는 새들이 실제 나무인 줄 알고 찾아왔다가 벽에 부딪혀 죽을 만큼 뛰어난 작품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 원효스님이 강당에서 불교 교리 설법을 하던 정신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최근들어 경주시가 의욕적으로 황룡사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데 대해 찬·반양론이 대두되고 있다고 김 실장은 얘기했다.

"황룡사 9층탑 복원을 두고 찬성론자들은 현재의 기술과 자재로 9층탑을 복원해 관광자원화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반대론자들은 9층탑의 실체모형을 알 수 없는데 복원을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고 유적지를 파괴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건립 추진 중인 황룡사 홍보 전시관에서 3D 영상으로 황룡사 모형을 관람한 후 넓게 펼쳐진 황룡사지를 바라보면서 상상을 해보는 '여백의 묘미'를 살리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경북일보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