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문화·예술

경북의 재발견(3)-경주 명활성

이원석(문엄) 2010. 1. 30. 21:37

사복과 원효 설화에 전해 내려오는 '불국토'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3.경주 명활성 (明活城)
 
경주 명활산성에서 바라본 보문호

 

신라 천년왕국 서라벌 경주에 혹한의 매서운 추위가 휘몰아치고 있다. 온몸에 겨울 햇살과 바람을 받으며 푸른 소나무와 푸른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오솔길 같은 산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잊혀진 불국토(佛國土)' 명활성을 찾아가는 길은 겨울바람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중생(衆生)의 고통을 구제해 주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따뜻하고 자애로운 손길이 길을 인도했다.

경주에서 신라역사와 문화재 해설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손수협(45) '신라마을' 대표는 마치 천년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듯 명활성을 오르며 여기에서 펼쳐졌던 자비로운 불국토를 되살리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주 명활산성

 

"명활성에는 신라 고승 원효와 사복에 대한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권4(卷四) 의해편(義解篇) 사복불언조(蛇福不言條)에 나온 설화를 소개를 하면 신라 진평왕 때 서라벌 만선북리(万善北里)라는 마을에 한 과부가 살았습니다.

과부는 남편도 없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상하게도 아들은 나이가 열두 살이나 되어도 일어나지 못하고, 말할 줄 모른 채 누워만 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아이가 열 살이 넘도록 누워만 있다는 뜻으로 사동(蛇童, 뱀아이) 또는 사복(蛇卜)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어설 줄 모르는 뱀귀신을 타고 났다는 뜻이지요. 어느날 사복의 어머니가 죽자 누워만 있던 사복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선사(高仙寺)에 있던 원효를 찾아가니 원효는 반갑게 맞이했으나 사복은 답례를 하지 않고 "전생에 그대와 내가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우리 함께 장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명활산성 작성비

 

원효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사복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니 사복은 원효에게 우선 포살(布薩)부터 시켜 계(戒)를 주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부처가 정해준 8가지 계율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을 포살이라 합니다.

원효는 시신 앞에 분향하고 단정히 앉아 "태어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도 말라. 세상에 나는 것이 또한 고통이니라!" 하고 계를 설했습니다. 사복이 원효에게 말이 너무 길어 번거롭다고 하자 원효는 다시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고통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두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지금의 명활성)으로 갔습니다.

동쪽 기슭에 이르렀을 때 원효가 "지혜로운 호랑이는 지혜의 숲에 묻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사복의 의견을 묻자, 사복은 게송(偈頌)을 지어 읊었습니다. "그 옛날 석가모니불이/사라수 아래서 열반하셨네/오늘도 그와 같은 이가 있어/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로 들려고 하네" 게송을 마친 사복은 띠풀의 뿌리를 잡아 뽑았습니다.

 

손수협 신라마을 대표

 

그런데 이상하게도 풀뿌리가 빠진 흙 구멍 밑으로 아주 아름다운 세상이 열려 있었습니다. 웅장한 산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솟아 있고, 여러곳에 전각(殿閣)이 있는데 모두 7겹의 난간을 돌리고 칠보로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인간 세상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복이 어머니 시신을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니 땅은 다시 합쳐지고 메고 갔던 상여만 남았답니다. 원효는 홀로 고선사(지금의 덕동 댐)로 돌아갔고 훗날 사람들이 금강산(현재 경주 소금강) 동남쪽에 절을 짓고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고 매년 3월 14일에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습니다."

신라시대 활리산(活里山)으로 불렸던 명활성은 설화에서 원효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고통' 이라며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탈'이라고 설하고 사복이 어머니 시신과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 곳이어서 신라가 염원했던 불국토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불국토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손수협 대표는 명활성의 역사에 관해 설명을 했다.

"경주 보문호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표고 259m의 명활산에는 5세기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토성과 진흥왕 12년(551)에 쌓은 석성이 남아 있습니다. 보문관광단지 입구로 들어가기전 삼거리 우측 50m 지점에 북문쪽 석성의 일부를 발굴 복원해 놓은 것이 보이고, 산 좌우의 능선을 따라 허물어진 석성의 흔적이 이어지는데 그 길이는 약 4.5km로 지금은 허물어진 성곽에 잡목들만 무성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라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1천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험난했던 역사만큼이나 무수한 이야기들이 이끼낀 돌속에 묻혀있습니다.

이곳은 신라의 모태가 되었던 斯盧(사로) 6촌중 고야촌(高耶村)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아 그들의 생활무대로 삼았던 곳이며, 삼국시대에는 왕도(首都) 동쪽을 방위할 목적으로 성곽을 쌓은 중요한 군사 요새였지요.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4년(405)과 눌지왕 15년(431), 자비왕 14년(471)에 왜병이 여러 차례 명활성을 공격한 사실은 경주 주변의 성곽 중에서 왜적과의 전투가 가장 많이 벌어진 곳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흥왕 때에는 기존의 토성 외에 돌로 튼튼한 석성을 쌓게 되었는데 1988년에 현재 복원된 성 근처에서 발견된 명활성 작성비에는 진흥왕 12년(551년)에 축조하였으며, 성벽을 쌓는데 동원된 담당구역 책임자와 그 이하 실무책임자의 이름, 담당한 성벽의 길이, 축성공사 날짜, 글쓴이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자비왕 16년(473)에는 명활성을 크게 수리하고 2년후에 이사하여 이곳에서 돌아가셨으며, 소지왕 9년(487)에 반월성을 수리하여 그 이듬해에 월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13년동안 궁성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또 선덕여왕 16년(647)에는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진세력을 저지하고 이전까지 유래가 없었던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을 폐하고자 이곳 명활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지요."

지금도 성내에는 문지와 건물지 허물어진 성곽 그리고 가끔씩 발견되는 기와 편과 토기조각에서 명활성 옛 영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손수협 대표는 "잊혀진 불국토인 명활성을 되살려 내는 것이 진정한 역사문화도시를 조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활성 있는 경주 보문은 신라 불국토의 중심"

손수협 신라마을 대표

"신라 천년왕국이었던 경주는 신라시대 불교에 심취한 왕조가 건설한 부처님 세계인 불국토 였습니다. 그 중 명활성이 있는 경주시 보문동(普門洞)은 '불국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문화체험장인 '신라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손수협 대표(사진)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예찬했던 것과 같이 신라는 '고요한 불심(佛心)이 깃든 동방(東方)의 빛'으로서 경주는 부처의 세계를 지상에 실현해 놓은 불국토 였다고 강조했다.

"보문(普門)은 명활성과 보문리사지 천군동 삼층석탑 등 불국토를 건설하려는 신라인들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보문 들판에 있는 진평왕릉 너머 불교의 세계인 도리천이라고 불려진 선덕여왕릉, 신이 노닐던 신유림, 신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천왕사가 있지요. 현재 국민관광 명소인 보문관광단지도 현대식 부처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명활성에 올라보면 서쪽으로는 낭산과 남산, 동쪽으로 함월산 등 불심이 깃든 유적들을 품은 명산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손 대표는 보문이란 명칭에는 불교의 세계가 함축돼 있다고 주장했다.

손 대표는 "보문(普門)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의 소리를 살펴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인데, 중생의 교화를 위해 중생의 근기에 따라 33가지의 형상으로 몸을 나타냅니다. 이를 불가에서는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부릅니다. 관음보살은 그 종류가 많지만, 성관음(聖觀音)만이 본신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문시현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 화신입니다. 보문은 삼국유사 사복불언조(蛇福不言條)와도 관계가 있는 이름입니다. 원효와 사복이 사복의 어머니를 장사 지내면서 그의 어머니를 등에 업고 활리산(活里山) 연화장 세계로 들어간 이야기도 보문의 이름 유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경북일보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