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담벼락의 금은 모두 내 길이 된다 - 백현국

이원석(문엄) 2009. 9. 28. 09:50

담벼락의 금은 모두 내 길이 된다 
                            

                             백현국(1960~)


저 담벼락을 생각해본다
키가 훌쩍 큰,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곱게 눈물을 찍어내던 내 누님과
억수로 운 없는 사내가 잠시 기댔던 담벼락
그리고 나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여자의
싱싱한 허리를 닮았던 담벼락을 생각해본다
이젠 아무 것도 단념시킬 수 없는 쇠잔한 모습 뿐
숨이 다한 흔적까지 나를 닮아있다
안쓰러운 흔적 위에 금이 간 내 등을 대 본다
담벼락이 내게 기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담벼락과 난 한 번도 길이 되지 못했다
골목을 거슬러 오는 모든 것을 위해 비켜 선
헐거운 담벼락이 되지 못했다
쓸쓸한 체온이 빠져나간 골목길을 걸어와
잠시 담벼락에 기댈 누군가를 위하여
이젠 완강한 몸을 풀고 서 있기로 한다
깊은 잠이 흘러든 담벼락처럼 눕기로 한다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진 길을 걷는 사람을 기다리며
담벼락에 등을 대고 담벼락이 되는 꿈을 꾼다
막살아 와 쩍쩍 갈라진 나의 담벼락을 생각해본다
구불구불 담벼락까지 따라온 내 길들이
담벼락에 눌러 붙은 금들이 된다
모두 내 길이 되고 있다

 

 


 

 

담벼락에 눌러 붙은 금들 속에서 인생이 보인다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상처가 시작되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프랑스 시인, 랭보가 말한 것처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 백현국은 담벼락의 금에서 상처의 흔적을 읽어낸다. 그리고 담벼락에 눌러 붙은 금들이 모두 삶의 길이 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담벼락에 등을 대고 담벼락이 되는 꿈을 꾼다
막살아 와 쩍쩍 갈라진 나의 담벼락을 생각해본다

그간 몰랐다. 담벼락이 되는 꿈을 꾸면서 지지리도 못난 삶의 아픔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어쩌면 별을 헤는 일보다 더 황홀한 순간들이 될 수도 있겠다.

백현국이 맛깔나게 풀어내는 담벼락의 금들을 좇아가노라면, 그간 잊고 살았던 내 몸 속에서 쩍쩍 갈라진 상처들을 한 번 만나볼 기회를 만날 것이다. 부디 놓치지 말기 바란다. 깊게 패인 금들이 살아나서 그대의 가을이 깊어질 것이다.


(장병훈의 '시와 연애를 하자'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생명력 있는 시를 잉태해 준 이 땅의 시인들과 시를 사랑해 준 독자들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시는 변방에서도 세상의 중심 가치로 빛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본다.)

 

 

 


 


   
▲ 시인 장병훈

시인 장병훈은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동리목월문학관의 ‘詩作나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화룡동 산 7번지의 선화여고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문학동아리 ‘좁은문’지기를 하고 있다.

* 영천뉴스24 블로그인 <별빛촌닷컴>(http://www.01000.in)을 방문하면 장병훈의 <시와 연애를 하자> 전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