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김유신이 수련했던 ‘중악석굴’이 극락굴?
화랑 김유신이 수련했던 ‘중악석굴’이 극락굴? | ||||||||||||||||||||||||||||||||||||||||||||||||||||||
영천향토사연구회 ‘돌구멍절’ 은해사 중암암 일대 답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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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33년 신미, 공의 나이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짐승같이 우리의 영역을 소란케 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일개 미약한 신하로서 능력을 생각지 않고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하늘은 굽어 살펴 저를 도와주소서!”
공이 이 말을 듣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재배하고 말하기를 “저는 신라인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에 와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였다. 노인은 묵묵히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거듭 열심히 간청하였다.
건복 34년에 인접한 적국의 침략이 점점 긴박하여지자, 공은 더욱 더 장한 뜻을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열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고하며 중악에서와 같이 축원하고 맹세하면서 기도하였다. 그 때 천관신이 빛을 비추며 보검에 영기를 쬐어 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밤에 허수와 각수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오자, 칼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임괄)에서는 경주 단석산에 이어 근자에 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중악석굴로 거론되고 있는 은해사 중암암 일대를 답사했다. 중악석굴은 1969년 5월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단석산으로 비정한 이래 거의 정설로 굳어졌으나 문경현 교수 등에 의해 중암암 일대라는 설이 제기됐다.
또 역사상 단석산을 중악이라 호칭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단석산이 곧 중악이라는 설은 단석산의 암석 형상을 김유신전설과 결부시킨 후대의 전승을 수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악이란 다름 아닌 대구의 팔공산이며, 은해사의 암자인 중암암 뒤의 석굴이 곧 중악석굴이라고 주장했다.<문경현, 1983, 「所謂 中嶽石崛에 대하여」, (신라사연구, 경북대출판부)>
중암암은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에 동화사를 창건한 분으로 진표와 영심을 이은 신라 법상종의 제3조인 심지왕사가 창건했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 중암암이 들어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창건 이래 별다른 변천 사실은 전하지 않으나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또 주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중암암은 돌구멍을 통해 절을 드나들게 돼있고 현재는 사용을 안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삼인암, 극락굴, 삼층석탑 등 볼거리도 참 많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으로 지난 1990년 ‘골화성에 대하여 -골화소국과 관련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 박사(58ㆍ경북대 강사)는 “아직까지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가 남아있는 신라의 삼산이었던 골화성(금강산성)의 존재로 봐서도 이곳이 중악석굴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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