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용마와 금강성주 황보 장군 전설 남은 금강산성

이원석(문엄) 2009. 3. 14. 19:17

용마와 금강성주 황보 장군 전설 남은 금강산성
영천향토사연구회 금강산 답사 후 정기총회 개최
이원석 기자 ycnews24@hanmail.net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임괄)에서는 14일 황보능장 장군과 용마의 전설과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가 전해지는 금강산성(골화성) 및 고경면 대의리 야산 고분 도굴현장을 답사했다.

   

 

체육시설 좀 못 미친 곳에 있는 말굽바위에 안내판을 세워서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쉽게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성산이씨 재실인 봉성재 고지기가 10여 년 전에 발견했다는 대의리 뒷산의 도굴된 고분으로 봐서 이 일대가 고대 영천의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또 오후에는 야사동 한 음식점에서 정기총회와 윷놀이를 개최했다. 2008년 결산과 2009년 사업에 대해 토의하고 4개조로 나눠 윷놀이를 하면서 친목을 도모했다.

그린환경센터 주위 산에 전해지는 금강성주 황보 장군과 용마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 말굽바위

영천시에서 강줄기를 따라 4km쯤 올라가면 주남평야 일만 두락의 젖줄기인 금호강을 가로 막은 주남 신보가 있고 다시 절벽 아래 오솔길을 거슬러 오르면 주남 구보가 나온다.

이 보의 서북 양면은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으나 동쪽과 남쪽은 높이 100m가 넘는 절벽이 곧 쓰러져 보안을 메울 듯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행여 넘어질까 지나는 이의 걸음을 재촉한다. 그 절벽의 중턱에 높이 10m정도의 큰 바위덩이가 곧 떨어질 듯 바위는 절벽을 밀고 절벽은 바위를 잡아당기고 섰으니 이것이 바로 용마바위이다.

   

 

고려 초기, 이 절벽을 중심으로 뻗은 금강산(지금도 금강골로 불린다.)에 큰 산성을 쌓게 되니, 당시의 성주는 황보 장군 또는 금강 장군이라 칭했으니 이분이 곧 영천 황보씨의 시조이며 지금은 3사관학교 영내에 그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용마바위의 절벽위에서 능선을 따라 100m쯤 올라가면 외성이 있고 다시 200m쯤 걸어가면 내성이 나오게 되는데 이 내성은 이 근방에서 가장 높아 사방 20리를 내다 볼 수 있는 좋은 전망대이다.

   

 

내성과 외성의 양면은 자연 방위선인 절벽을 이용하였고 나머지 양쪽은 토성을 높이 쌓았다고 한다. 지금도 3-4m의 토성이 오랜 세월 풍우에 깎인 채 풀 섶에서 옛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성내의 너른 뜰에는 깨어진 기와 조각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당시의 웅장함을 얘기해 주고 있다.

당시 성주인 금강 장군이 국령(國令)을 받아 수년에 걸쳐 이 성을 완성할 무렵 성주는 물론 부역 나왔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든 어느 고요한 밤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산성은 물론 이 지방에 널리 깔린 적막을 깨뜨렸다.

   
▲ 금강산성 표석비

이에 영문을 몰라 정신을 잃고 서있는 인부들 틈에서 장군은 성큼 성큼 밖으로 나갔다. 뜻밖에 성 밑 절벽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괴상한 물체가 절벽위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날개가 달린 말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서 성 쪽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눈을 비비며 의아하게 여기는 장군 앞에서 내려앉은 말은 무릎을 꿇어 주저앉는 것이었다.

장군은 하늘이 주신 선물로 알고, “너는 나를 받들고자 하는가?” 하니 말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나와 함께 지낼만한 말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하며 크게 기뻐했다.

   

 

다음날 어제 저녁에 서기가 서려있던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절벽이 크게 갈라져 새로운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것은 용마가 단단한 절벽의 중간을 뚫고 솟아올라온 곳이며 우레와 같은 큰 소리는 이 바위가 깨어지는 소리였다.

얼마 후에 성이 완성되어 성의 이름을 금강산성이라 하고 장군 역시 금강장군이라 칭하였다. 이 성의 낙성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성주인 장군은 물론 군사들과 지금까지 성을 쌓느라 온갖 고생을 다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외성 뜰에 자리를 잡았다.

   
▲ 금강산성에서 내려다본 대의리

잔치가 무르익어 군사들의 활쏘기, 칼쓰기, 창쓰기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장군이 여러 사람 앞으로 나서서 “낙성을 축하하는 뜻에서 나도 한 가지 경주를 해보자.” 하며 용마를 몰고 뜰 아래로 내려섰다.

“이 성이 완성되자 나의 말이 나타났으니 오늘 내가 이 말의 힘을 시험해 보겠다.” 하고 말을 탔다. 이 때 군사들은 무슨 경주일까? 하고 모두들 궁금히 여겨 잔치자리는 숙연해 졌다.

   
▲ 성산이씨 재실 봉성재

“오늘 이 기쁜 날을 맞아 너의 힘을 한 번 자랑해 보아라. 내가 이 활을 쏠 터이니 이 화살과 경주를 해보는 거다. 만약 이 화살을 따르지 못하면 너의 목을 베리라.” 하고 말에게 이른 장군은 마상에서 화살을 활에다 메겨 활줄을 힘껏 잡아당기고 말에 채찍을 가해 말을 달렸다.

이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슨 경주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장군의 손에서 화살이 떨어진 뒤에 힘껏 절벽을 차고서 번개같이 하늘을 날기 시작한 용마는 절벽아래 흐르는 강을 건너서, 들을 지나고 아득히 보이는 저편의 산기슭까지 단 숨에 이르러서는 땅에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곧 뒤돌아서면서 고개를 들고 큰 울음을 터뜨렸다.

   
▲ 도굴된 고분

마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던 장군은 화살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장군은, “약속대로 너는 화살을 놓치고 따르지 못하였으니 내 마땅히 너의 목을 베리라.” 하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장군의 시퍼런 칼이 말의 목에 닿았다. 이때였다. ‘씽’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화살은 장군이 칼에 맞아 비틀거리는 말의 머리에 꽂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장군이 쏜 화살이었다. 화살보다 용마가 훨씬 빨랐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장군은 힘없이 말 등에서 내려앉아 크게 한숨을 내쉬며 “내가 너무 성미가 급했구나.”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용마는 붉은 피를 흘리며 주인을 잘 못 만남을 후회하는 듯, 주인을 원망하는 듯 큰 눈알을 부릅뜬 채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장군은 다시 한 번 자신이 성미가 급함과 자신이 쏜 화살의 힘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후회하며, 서운해 하며 그 자리에다 죽은 말을 고이 묻으니 지금도 고경면 창하리에는 말무덤이라는 커다란 무덤 하나가 해 묵은 솔밭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그 인근 동네를 말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장군도 용마에 대한 가혹했던 잘못을 뉘우침과 자신의 운명을 탓하던 나머지 끝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군사들과 마을 사람들은 장군이 회복되기를 빌었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이 장군도 용마가 간 길을 걷게 되었다.

군사들은 장군을 말무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금의 육군 삼사관학교 영내에 고이 안치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용마바위에 남은 말발굽과 금강산성 및 금강장군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