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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선린외교의 조선통신사와 영천' (이원조 영천시 문화예술담당)- 영천의 역사적 위상에 학계 주목

이원석(문엄) 2007. 4. 6. 17:59
▲ 이원조 문화예술담당

최근 들어 평화와 문화의 사절이자‘誠信交隣’의 한 일 선린 우호외교인 조선통신사를‘한류문화의 뿌리’로서 재조명하는 연구활동에 이어 한ㆍ일 양국간 조선통신사 문화교류사업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임진왜란으로 패망한 풍신수길에 이어 새로운 정권을 쥔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의 에도막부가 일본이 잡고 있던 백성들의 송환문제를 빌미로 수교를 도모하려던 1607년 첫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지 40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일본은, 늘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역사왜곡과 망발로 이웃나라의 비난을 받기 일쑤고 특히 우리 국민에게는 반만년 역사에 항상 불안하고 침략적이고 심지어는 강탈과 야수(?)와 같은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려 말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23회, 임진왜란 이후 12회의 대일 외교사신들이 생생하게 기록한 ‘해행총서’의 기록을 보면 교린이신(交隣以信), 즉 선린으로 왜국을 교화하고자 노력해 온 고려말과 조선의 안보정책상 고민과 항상 우월한 문화를 왜국에 전승해 주었던 우위의 한일외교사를 읽을 수 있고, 또한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매우 풍부한 사료를 제공해 주고 있어 최근 사학ㆍ문화계에서 활발하게 불고 있는‘조선통신사’재조명과정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


특히 전 4책에 수록된 통신사기록에는 우리 영천의 영원한 표상인 포은 정몽주 선생이 불사이군의 충신 이전에 외교관으로서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1607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2차례의 통신사 사절단, 수행원들이 쓴 약 34종의 기록에는 우리 영천의 객관(군청)ㆍ군수ㆍ조양각, 신녕의 장수도 찰방ㆍ신녕현감 등을 기록한 부분이 현재 13종으로 최근 이봉한의 서간문을 포함하여 추정컨대 12회의 사행에서 11회를 신녕, 영천으로 거쳐 간 것을 알 수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이 건립한 조양각과 조선통신사 역사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지역 사학계에서 이러한 소중한 사실을 그동안 방기했다는 것이다. 가장 긴 국문기행가사로 널리 알려진 1763년 김인겸의‘일동장유가’는 11번째 통신사 기록문으로 여기에는 영천 조양각에서 임금이 베풀어 준 공식적인 잔치인 전별연에 순찰사는 물론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사절단 일행이 모두 모여서 조양각 아래에서 마상재(말 위에서 기교를 무리는 전통 기병무예)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1763년 11회 사절단 단장이라 할 정사로서, 대마도의 고구마를 우리나라에 전해 온 조 엄의 해사실기에는 도 관찰사는 물론 안동, 경주부윤, 칠곡, 함양부사까지 조양각의 전별연에 참석할 정도로 영천 조양각의 명성을 높았으며, 또한 본인은 상중이라 임금(영조)이 마련해준 성대한 위로잔치에 막상 술상을 받을 수 없어 지금 복원된 조양각처럼 방에서 경상 감사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요즘들어 우리 영천시민들의 심기를 건들고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에 대한 논란에 굳이 대응하지 말자는 여론에 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사료를 덧붙여 본다.

  

淸溪石壁抱州回  청계석벽포주회

更起新樓眼豁開  갱기신루안활개

南畝黃雲知歲熟  남묘황운지세숙

西山爽氣覺朝來  서산상기각조래

風流太守二千石  풍류태수이천석

邂逅故人三百盃  해후고인삼백배

直欲夜深吹玉笛  직욕야심취옥적

高攀明月共徘徊  고반명월공배회


  맑은 시내 돌벼랑은 고을을 안고 도는데

  다시금 새 누각 이룩하니 눈이 활짝 트이네

  남쪽이랑 누른 벼는 풍년이 왔음을 알리고

  서산의 서늘한 기운은 아침이 되었음을 깨닫네

  풍류를 좋아하는 태수(군수)는 녹봉이 이천석인데

  옛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술이 삼백 잔이라

  곧바로 밤이 깊어 옥피리를 불면서

  밝은 달 높이 휘어 잡아 함께 배회하고자 하네


포은선생이 이수삼산이 훤히 보이는 영천고을 중심지인 지금 그 자리에 당시 부사였던 이용과 함께 건립하면서 영천을 읊은 이 시를 따라 율곡 이이, 서거정, 김종직, 박인로 등 명현석학들의 풍류를 담은 시가 63편 걸려 있으며 고려말 일본 사신으로 건너갔던 선생의 마음과 교통하려던 1643년(인조 21) 정사(正使) 윤순지가 포은선생의 시를 원운으로 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아쉽게도 현판은 없지만 영양지 등에 전해 옴).

  

野桃纔落鷰初回  야도재락연초회

江閣迢迢傍晩開  강각초초방만개

遷樹乍看黃鳥出  천수사간황조출

捲簾時許白雲來  권렴시허백운래

沙邊芳草供詩料  사변방초공시료

波底流霞入酒盃  파저류하입주배

未向名區酬宿債  미향명구수숙채

暫停征旆爲遲徊  잠정정패위지회


  들 복숭아 꽃 겨우 떨어지자 제비 처음 돌아오고

  강가의 누각은 우뚝하게 강 곁에 석양빛에 열렸네

  숲을 옮겨 잠시 꾀꼬리 나오는 것을 보겠고

  주렴을 걷어 때때로 흰 구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네

  모래밭 가의 꽃다운 풀은 시 재료를 제공하고

  물밑에 흐르는 놀 술잔에 비춰 들어오네

  이름난 땅에 묵은 빚을 갚고 떠나지 못해

  잠깐 가는 깃발 멈추고 느릿느릿 머뭇거리네


1377년, 왜구 침략이 큰 고민거리였던 조정의 명을 받아 사신으로 왜국에 건너가 규수(九州)절도사로 부터 포로로 잡혀 있던 수백명의 백성을 귀환한 포은선생의 세운 조양각의 소중한 가치를 조선조정은 일찌감치 인정한 것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신녕의 환벽정과 장수도역(찰방)의 사료적 가치 높아


이보다 앞선 1636년(인조 14년)의 4차 통신사행 때 부사였던 김세렴의 해사록(海槎 : 바다에 띄운 땟목, 즉 배를 타고 해외에 간다는 뜻)에는 신녕초등학교 옆에 있는 당시 빼어난 대나무숲 안에 위치한 환벽정에 빽빽하게 걸린 시편액을 묘사하고 아담한 절벽아래 흐르는 개울위에는‘선승교(選勝橋)’라는 널다리가 걸쳐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긴 대나무 수백 그루가 물과 비탈에 그늘져 있어 맑고 뛰어난 경치에 몰입한 나머지 상사와 함께 저녁에 돌아 왔을 정도로 환벽정 일대의 풍광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인 만큼 영천은 서울, 전라, 충청 등지에서 발탁된 사신 일행들이 합류한 지역으로, 멀리 경남지역의 고을 수장까지 영천에서 사신들에게 인사하고 성밖 냇가에서 달리는 말위에 올라섰다가, 누었다가, 거꾸로 섰다가, 옆으로 붙었다 하는 날쌘 말재간꾼의 마상재를 구경하기 위해‘구경꾼들이 담을 둘렀다’는 기록은 일찍이 영천에서 마상재로 인한‘영천말[大馬]’의 회자되었음을 추측해 봄 직하다.

 

영천과 관련한 다양한 조선통신사 문화사업의 비전

 

아울러서 적게는 328명(12차), 많게는 첫 사신단이라 할 1607년의 504명에게 제공되었던 수 십 마리의 마필 조달은, 당시 14개의 역을 거느린, 오늘날 지방철도청 규모의 신녕 장수도찰방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며, 또한 평균 300여명이 넘는 체류단이 길게는 2년 이상 머물면서 그들이 가져 갈 각종 한약재, 생필품은 당연히 명산 보현산의 한약재와 사통팔달의 원할한 교통 입지에서 활발하게 형성된 장시(場市, 시장)가 없었다면 조선통신사 역사에 과연‘영천’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용재총화’에는 영천과 신녕의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금부터라도 전문학회나 전문가들에게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조선통신사에서의 영천의 위상을 재조명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이를 토대로 영천의 당면하고 있는 주요 시책사업인 승마휴양림 조성사업, 한방 특구, 거점면 소재지 중심마을 개발사업(신녕면) 등의 정체성 확보에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선통신사의 화려한 부활-영천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


1607년 이후 200년이 넘게 한 일 문화교역의 꽃을 피우며 평화의 세기를 이끌어 왔던 조선통신사 문화사업이 일본에서는 이미 지역과 국가적 축제로 정착시켰고 수년 전부터 부산에서는 또 하나의 문화사업으로서 인프라를 구축해 가고 있으며, 514㎞, 천리가 넘는 서울ㆍ부산간 통신사 왕복 사행길을 낀, 소위 영남대로변의 시ㆍ군마다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둘 만큼 조선통신사가 21세기를 맞아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과거를 보지 못함으로써 미래에 대해 예측할 겨를도 없이 맹목적으로 대처하는 어리석음을 많이 보게 되는데 하물며 티끌같은 조그만 소재로 지역이미지를 구축해 가는 요즈음 자치단체의 행보에 우리시의 노력도 늦었지만 오히려 풍부한 조선통신사 소재를 계발하는데 주력할 필요성을 절실히 공감하며 적절한 문화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 조선통신사의 역사성을 복원하고 문화유산으로 공감대를 넓히려는 작업이 한창인 이때,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맞아 우리 영천시보다 규모가 작다고 할 수 있는 군단위에서 조차 이미 조선통신사 연고도시로 등록해 각종 한ㆍ일교류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늦게나마 9번째 연고도시로 등록을 약속한 우리 시에 문화관광부 등의 지원을 받은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가 힘을 보태주고 있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통신사의 출발지인 서울 숭례문에서 부산까지의 12개 이정표지석 설치지역으로 선정해 그나마 역사적인 위상에 명목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또한 지난 4월 1일부터 출발한‘조선통신사 옛길 한ㆍ일 우정걷기’의 40여 한일교류단이 신녕, 영천지역 조선통신사 유적지 답사를 겸한 영천방문이 계획되어 있어 이들을 반기는 행진에 많은 시민, 학생들이 같이 참여하였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아울러서 한약축제 같은 우리 시의 대표적인 축제때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웅장한 그림도 그려보고, 말 잘타는 기마민족의 근성을 조그만 우리 영천에서 승마휴양림사업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와 발맞춰 6차례나 기록이 되고 있는 마상재도 한번 재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제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감히 계측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정통성을 지닌 문화도시 영천으로서 가치를 높일 때다.